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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들19

daydream 키를 넘기는 목초밭 사이를 걸어 도착한 강가. 바람조차 닿지 않는 고요한 수면에 비치는 하얗고 파란 하늘. 그 수면에 마주앉은 의자 두개. '어떠셨나요' 높낮이 없는 고요한 목소리. '좋았어요.' 그렇게 시작되는 좋지 않았던 이야기. 거미줄같은 가느다란 선을 타고 이야기는 드문드문 이어지고, 가장 믿음직스럽고도 가장 불안한 인간관계는 50여분만에 종료된다. '다음주에 뵙죠.' 늘 같은 인삿말. 얼굴이 흐려지고 나는 당장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목초밭을 빠져나온다. 그 목초밭 너머에는 여전히 고요한 강과, 의자 두개가 앉아 있을테지만, 영원히 내것은 되지 않으리. 2020. 7. 7.
사랑에 빠진 딸기 사랑에 빠진 딸기 나는 딸기농장의 아들입니다. 나는요, 딸기를 어엄-처엉- 좋아하죠! 사실, 아버지가 총각 때, 잘 관리 하시던 배 밭을 처분하시고 딸기로 주 종목을 변경하신 건, 순전히 어머니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딸기광이었거든요. 통통한 볼에 주근깨가 귀엽던 어머니의, [딸기를 가꾸는 남자가 좋아요.] 라는 말 한마디에 아버지는 당장 딸기농장을 알아보고 다니셨던 겁니다. 어쨌든. 뱃속부터 딸기를 먹고 자란 나는 세상에 나와서도 여전히 딸기가 좋습니다. “야, 이 자식아! 수확을 해야지 니 배에 쳐 넣으면 어뜩하냐!” 가득 담긴 딸기를 나르며 몇 줌 주워 입으로 쑤셔 넣는 나를 보고 아버지가 버럭 소리를 치셨습니다. “아부지도 차암, 제가 얼마나 먹는다고 그러세요. 거 한 두알 먹는 거 가지고..... 2018. 2. 27.
Please, Please. Please, Please. C는 잠이 아직 덜 몰려나간 얼굴로 세면대 앞에 서서 길게 하품을 했다. 목을 돌려 뚜둑, 하고 소리를 내자 조금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기계적으로 양치컵에 썰렁하니 꽂아진 칫솔을 집어 들고 구겨진 치약튜브를 꾹 눌러 짜서 치약을 발라 이에 가져갔다. 입 안 가득. 그리고 비공을 타고 싸한 박하향이 올라온다. 텁텁한 입안을 개운하게 헹궈주는 역겨운, 혹은 상쾌한 치약 맛이 혀를 달군다. C는 혀가 화끈거려 얼른 입안의 거품을 뱉고 연신 물을 헹구어 냈다. 그리고는 혀를 길게 빼고 거울 너머의 젖은 입을 들여다본다. *** 어제 저녁, (자정이 다 된 시각이었으니까, 밤이란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동창생이자, 유일하게 가깝게 지내는 N이 불러서 나가 보았더니 .. 2018. 2. 21.
어느 부부의 늦은 저녁식사 어느 부부의 늦은 저녁식사 가엾은 자여, 무엇을 택할 것인가. 무한한 분노와 무한한 절망 중에. - '실낙원,' 혹자는, 이런 상황을 당황스럽다. 혹은 경악스럽다라고 표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쪽’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 달그락, 따각, 챙. 오늘도 이른 아침 식사가 오가는 식탁에 목소리는 없었다. 간혹 위치를 잘못 잡은 젓가락이 하얀 접시를 강타하는 소리. 신경질적으로 밥 속에 쑤셔 넣는 수저가 그릇 바닥을 긁는 소리. 들어 마신 물 컵이 식탁유리에 부딪히는 소리만 간간히 대화처럼 이어진다. 그릇을 대충 비운 그가 의자를 박차다시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도적인 게 분명한 소음 같은 발소리를 내며 싱크대로 걸어간 그는 밥그릇을 던지듯 개수대 안에 넣고 식탁의자에.. 2018. 2. 20.
드디어 드디어 소년은 벌써 3일째, 폭이 좁은 갓길의 외진 버스정류장에 해가 질 무렵부터 서 있었다. 서 있는 내내 허공을 향하고 있는 듯 보이는 그의 시선은 4차선 너머 검은 들판을 가로질러 멀찍이 서있는 높은 공장굴뚝의 점멸하는 붉은 전구를 향해 있었다. 똑같이 생긴 세 개의 거대한 굴뚝 꼭대기와 그 몸통 중간에 두 개씩 붙어 서로 번갈아가며 깜빡거리는 붉고 노란 불빛 때문에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보이는 저 구조물에 특별한 의미나 가치가 있어서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 못 박히듯 꼼짝 않고 서서 그 불빛들을 바라보거나 바닥의 돌을 도로를 향해 신발 끝으로 툭툭 차며, 소년은 밤 10시 정도까지 정류장과 그 근처를 고인 물에 떠있는 낙엽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11시가 되기 전 즈음에 정류장에.. 2018. 2. 20.
5분 5분 여름비가 내렸다. 아침나절은 잡아먹을 듯 푹푹 찌는 맑은 하늘이더니, 10시도 채 지나기 전부터 순식간에 검어진 하늘이 찡그리다 못해 비를 툭툭 떨궜다. 그래도 나는 온종일 비가 내렸으면 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의례 두통도 따라와.- ‘그’가 하던 말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가 내렸으면 했다. 어차피 덤벙거리는 그이지만, 오늘은 날까지 맑았으니 당연히 우산을 챙기지 않았을 것이고 오후까지 이어 내리는 이 비를 온통 맞으며 이리저리 뛰어 다닐 테고, 재빠른 우산장수들이 여기저기서 우산을 내밀며 아무리 사라고 졸라도, 그라면 젖은 손으로 지갑을 꺼내기 싫단 시답잖은 이유로 그냥 우산들을 지나쳐 뛰어갈 것이 뻔하기때문이다. 그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더 좋을 것 같다. 약도 챙겨먹지 말고 .. 2018. 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