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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wing

부식 Corrosion

by 하달리 2015. 12. 9.

부식 - Corrosion
34×49cm B on paper  2007 11 17 4절 드로윙지 위에 4B 연필

 

그가 차 트렁크를 열었다. 달도 없는 밤. 어둠은 이미 사방을 집어 삼켰다. 그는 망설임 없이 트렁크에 든 큰 가방을 끌어 내렸다.
그녀의 생명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는 그녀의 몸뚱이가 담긴 가방을 질질 끌어서 늪 가까이로 가기 시작했다. 그가 걸어온 길에 가방에서 시작된 핏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늪 앞에 도달하자 그는 가쁜 숨을 내쉬면서 가방을 내려다 봤다.
이 가방에 든 게 정말 그녀가 맞을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소리 지르던 그녀가 이렇게 가방에 구겨져 넣어질 줄 그녀는 상상도 못했을 테지. 그는 웃음이 나와서 작게 웃음을 흘렸다. 어둠이 가득 찬 숲속에 그의 웃음소리가 길 잃은 혼령처럼 떠다녔다.

자. 이제 이별할 시간이야. 드디어 가방을 밀어서 늪으로 넣어 버리려는 순간.

“참 이상하지...”

그는 불에 데인 듯 가방에서 손을 황급히 땠다. 누구지? 어디서 들리는 소리지? 그는 석상처럼 멈춰 서서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참 이상하지?...”

그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이 목소리는. 가방에서 나는 그녀의 목소리.

그는 온몸이 멈출 수 없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황급히 고개를 털었다. 헛 것을 듣는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꼼짝 않고 늘어져 있는 가방의 지퍼를 만졌다. 잠깐의 고민, 그는 천천히 지퍼를 열었다. 벌어지는 가방 틈새로 핏덩이와 함께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그녀의 몸뚱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허공을 향해 멍하게 뜬 눈과 피가 메말라 붙은 입술이 보였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참 이상하지...자기?... 당신을 위해 사준 가방 안에서 내가 이렇게 썩어 가고 있으니 말이야...”

달도 뜨지 않은, 그림자 하나 없는 검은 숲이 그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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