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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Said/Memento

조각글

하달리 2018.03.24 19:27

1.

다 잃었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어서 주머니에 가득찬 먼지를 가치있는것인냥 잔뜩 움켜쥐고 꺼내들어 흔들어보인다.

다 잃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어쩌면 애초에 손바닥에 쥐어진것은 이 지지한 먼지들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책상에 잔뜩 웅크리고 앉아 열심히 펜을 굴려보고 대단한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마주보고 크게 웃는다.

빈 방. 빈 손. 빈 주머니.

텅 빈,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텅 비었다. 모두 사라져버렸다.



2.

힐끗 바라본 그 눈은 상당히 작고 거무잡잡했는데, 그 한가운데 박힌 눈동자는 흔해빠진 표현을 빌어 별처럼 반짝거렸다.

그 성가신 반짝거림이 자꾸 “당신의 눈 뒤에 숨겨둔 생각을 바라보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자꾸 헛기침을 하며 눈을 피했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이고 달아나면서, 다시 만난다면 일부러라도 눈길을 피해야지, 생각했다. 안 그랬다간 그의 눈동자의 빛을 혼자만 바라볼 요량으로 그 마른 양볼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두 번 다시 놓아주지 못할것 같아서.



3.

그 움직임.-

숨이 턱턱 막힌다. 퍼붓는 비에 신명나는 와이퍼질에도 차창은 내 속내처럼 잔뜩 울렁거리고 흠뻑젖는다.

그러든 말든, 한계에 달한 속도는 늦춰지지않는다.

곧, 곧 닿을거야. 거의 다. 아니, 거기까지, 아니 그 이상도, 

모르겠는 말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응원한다. 턱에 힘이 빠지고 멍청한 표정이 얼굴에 잔뜩 낀다.

절대 멈추지 못할것 같은 순간, 반쯤 뜬 눈앞에 붉은 불빛이 퍼진다. 

난 착한 학생이 되어 오른쪽 다리에 힘을 잔뜩 쥐고는 몸이 쏠리도록 멈춰선다.



4. 

상처.-

살곰살곰 보여주기도 아깝던, 곱고 감치던 13개의 상처는 이제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 흉터가 되었네.



5.

손가락사이 겹쳐 닿은 네 피부에 가슴속이 자꾸 따끔거린다. 이러다 죽을것 같아서 당장 잡힌 손을 뺄까 망설여지지만 그럴 용기도 없다.



6.

창을 넘긴 햇빛이 그녀의 손등에 환한 점을 만들었다. 빛은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작은 볕. 아주 작아서 볕이라기보다 흰 점 같았다.

그런데도, 그 작은 범위의 감촉으로 차가운 몸은 서서히 뜨거워졌다.

그리고 검은 가슴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포기하지마, 죽지마, 슬퍼하지마, 울지마.

작은 볕, 작은 목소리.

피가 흐르는 소리만큼이나 고요하고 조심스러운 속삭임.

작은 볕, 작은 온기.

이 세상에 속하지 못한, 이 세상에 남은, 남아있는 나를 위한 유일한 응원.



7.

고백? 그런 대단한 것 해본지도 오래야. 고백하고 싶은 마음까지도 다 포기하고 살다보면 심심하기 이를데없는 고독이 바싹 다가오지. 근데 처음에는 거지같고 우울할뿐이던 그 맛이 시간이 가면 제법 익숙해진단말야. 그때쯤엔 고독을 포기하는 것도, 사랑을 선택하는 것만큼이나 고민되는 일이 되어 버린단 말이지.



긴 달리기의 끝, 그 끝은 모두가 기대하는 종착지점이자 결승점일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윽고 도달한 곳, 그곳에는 수고를 응원하는 관객도 터질듯한 가슴을 가로지르는 노란색의 결승선도 없다.

그곳은 그저 길이 끊긴 까마득한 낭떠러지, 누군가 도달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듯, 황량한 바닥의 흰 선은 다 낡아 흐려져 있다.




사랑

우리가 무언가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대부분 사랑이 응답받아야만 놀랍고 아름다운 것이라 여기지만, 사랑은 형성되는 때부터 소멸하는 순간까지 단 한조각도 비참하거나 못나거나 하찮거나 가치없지 않다.

더이상 사랑을 만들어내지 못하거나 사랑의 온도를 느끼지 못할때 그때야말로 우리는, 죽은 나무처럼 태양의 움직임이나 대기의 변화에 반응하지 못하고 경직되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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