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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ction/Pieces-단편

어느 부부의 늦은 저녁식사

by 하달리 2018. 2. 20.

어느 부부의 늦은 저녁식사

 

 

 

가엾은 자여, 무엇을 택할 것인가. 무한한 분노와 무한한 절망 중에. - '실낙원,'

 

혹자는, 이런 상황을 당황스럽다. 혹은 경악스럽다라고 표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쪽’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

 

 

  달그락, 따각, 챙. 오늘도 이른 아침 식사가 오가는 식탁에 목소리는 없었다. 간혹 위치를 잘못 잡은 젓가락이 하얀 접시를 강타하는 소리. 신경질적으로 밥 속에 쑤셔 넣는 수저가 그릇 바닥을 긁는 소리. 들어 마신 물 컵이 식탁유리에 부딪히는 소리만 간간히 대화처럼 이어진다.

  그릇을 대충 비운 그가 의자를 박차다시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도적인 게 분명한 소음 같은 발소리를 내며 싱크대로 걸어간 그는 밥그릇을 던지듯 개수대 안에 넣고 식탁의자에 걸쳐두었던 웃옷을 낚아채서 바로 현관으로 나갔다.
  양팔을 식탁에 기대고 젓가락 끝으로 밥알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고 그런 그를 보았다. 인사도 없이 나가는 그의 등 뒤에 - 다녀오세요. 속으로 소리 내어 본다. 그러든 말든 그는 구두가 잘 안 신기는지 말없이 탁탁거리는 신발 소리와 옷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일찍 오세요?”

 

  그녀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겨우 용기 내어 짐짓 밝게 물었다. 더 늦기 전에 그녀도 그녀가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적어도 안부 인사 정도는.

 

  “......”

 

  그는 대답 없이 그대로 몸을 일으켜 문 밖으로 나갔다. 대답은커녕 삣. 삣. 삐- 문이 잠기는 소리만 난다. 아마 구두도 제대로 신지 않고 그냥 가버렸을 것이다. 그녀 목소리가 바지 뒤춤이라도 잡아 챌까봐 두려웠던가보다. 일찍 오냐는 말은 그저 인사일 뿐인데,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고 일찍 들어와!’ 라는 명령으로 들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사람이다. 이 남자가.
  그녀는 한숨을 쉬고 달력을 보았다. 1년 8개월. 그리고 29일. 그녀가 좋아하는 9라는 숫자가 있어서 좋다. 그리고 내일이면 9개월이 되니까 더 좋다. 그녀는 흘러내린 머리를 다시 질끈 묶고 빈 그릇 들을 치웠다.

 


***

 


  오후 3시. 그녀는 뜨개질을 하며 TV를 보며 한참 웃었다. 뜨개질의 목표는 탁 보기엔 얇은 목도리 같지만 딱히 목도리도 장갑도 스웨터도 아니다. 그저 털실과 시간을 소비하기 위한 소일거리일 뿐이다. 그녀의 발치에 수북이 쌓인 털실과 각각의 색이 규칙 없이 이어진 목도리가 뱀처럼 똬리를 칭칭 말고 누워있다. 한참 웃던 그녀는 손에 든 뜨개 감을 내려놓고 TV 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커피색 광목천으로 커버를 만들어 씌운 3인용 소파에 몸을 길게 눕혔다. 그녀는 자리에 누운 채로 사이드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책을 원숭이마냥 손만 길게 뻗어서 집어 들었다. 똑바로 누워 머리 위로 지붕처럼 든 책속의 빼곡한 활자를 바라본다.

 

  -관계의 회복은 서로간의 노력에서 시작된다. 어느 한쪽의 노력은 결국 바퀴가 빠진 자동차처럼 한 자리를 맴돌게 될 뿐이다. 스스로. 그리고 서로가 회복을 꾀할 때 그것은 진정한 행로를 잡-

 

  그녀는 그대로 책을 덮고 휙- 머리위로 집어 던졌다. 털퍽. 그녀의 기분을 따라 책은 깨끗이 닦아 윤이 나는 뽀얀 바닥에 페이지를 엉클어뜨리며 뱅그르 돌아 떨어졌다. 그녀는 멍하니 배에 손을 모으고 천장을 바라보다가 팔딱 다람쥐처럼 몸을 일으켰다. 사뿐사뿐 걸어간 그녀의 다리가 작은 꽃이 수놓인 하얀색 면 치마에 닿아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 그녀는 몸을 굽혀서 책을 다시 집어 들어서 보이지 않는 먼지를 톡톡 털어서 원래 있던 테이블에 반듯이 올려두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달력을 본 그녀, “아. 맞다.” 하고 작은 소리를 내고 욕실로 들어갔다.

 

  작은 그녀의 손에 들린 임신테스트기는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소녀의 손에 들린 것 마냥 어색하고 거대해 보였다. 침을 크게 삼킨 그녀의 시선이 테스트기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1초. 2초...시간이 지나고 테스트지의 표면은 결과를 도출한다. 자기도 모르게 숨을 깊게 참았던 그녀가 테스트기를 든 팔을 늘어뜨리고 깊고 긴 한숨을 쉬었다.


 

***

 


  오후 11시23분. 그가 정확히 현관문을 연 시간이다. 그는 자기 집이지만 집에 들어올 때는 으례 도둑처럼 발끝으로 걸었다. 불이 꺼진 거실은 그녀가 잠을 자거나 서재에 있거나 두 가지 중 하나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집안에 켜진 불이라고는 오디오의 푸른 전자시계, 밥통의 경과 시간을 알려주는 빨간 글자. 어색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의 웨딩촬영사진이 반뜩이는 디지털액자 뿐이다. 그는 소리 안 나게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섰다.
  서늘한 발끝의 느낌이 보일러는 돌지 않는 것 같다. 아니면, 또 시위한답시고 집을 나간 거 아냐? 밑도 끝도 없이 그의 부아가 치민다. 거실의 불을 켜니 역시나 텅 비어 있다. 드디어 완성한 그녀의 이해 못할 목도리인지 뭔지가 곱게 개켜서 소파 한쪽에 놓여 있고 털실도 색별로 가지런히 말려 늘 들어 있는 상자에 들어있다. 말끔하게 정돈된 집은 아무도 없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적막하다.
  그가 빠른 걸음으로 서재로 가서 문을 벌컥 열었다. 컴컴한 어둠. 컴퓨터도 끈 지 한참인지 열기 한줌 없다. 그가 몸을 돌려서 침실로 걸었다. 급하게 연 침실안도 불이 꺼진 채다. 열린 문을 통해 거실에서 쏟아지는 빛에 텅 빈 침대의 실루엣이 보인다. 침실에 한동안 들어오지 않아서인가 남의 침실처럼 불편하고 어색하다 못해 나란히 놓인 연두색과 분홍색의 봉긋한 배게는 불경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허리에 손을 얹고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석인 웃음소리를 냈다.

 

  “하, 아주... 또 기어나갔다 이거지?”

 

  혼자 중얼거린 그가 몸을 돌려서 밖으로 나갔다. 안쪽 베란다에 놓인 냉장고로 걸어가며 그는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냉장고의 양 문은 벌컥 열고 뭐든 마실 것을 찾았다. 모양대로, 크기대로, 순서대로, 필요대로 차곡차곡 정리된 냉장고 안을 열심히 뒤적였지만 나란히 세워진 물병은 텅 비어 있고 소스 병들만 눈에 들어온다.

 

  “도대체... 마실 거 하나 안 넣어 놓고...”

 

  라벨 전체가 영어로 가득한 말간 소스 병을 들고 음료수인지 확인하고자 뚜껑을 열려는 순간. 뒷목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윽-”

 

  그가 신음하면서 아픈 뒷목에 손을 가져갔다. 끈적끈적하고 뜨끈한 게 만져져서 그는 몸을 일으켜서 뒤를 돌아봤다.

 

  “이게..무슨...”

 

  그러나 바로 다음 아래턱을 제대로 처 올리는 묵직한 타격에 그는 그대로 열린 냉장고 안쪽으로 쓰러졌다. 그가 부들거리는 손을 뻗어 냉장고 문을 잡고 일어나려고 애썼다. 한 번 더 눈앞이 번쩍이고 핑핑 돈다. 강도, 강도다! 정신 차려! 그러나 바로 다음 더 무거운 타격이 네댓 번 그의 머리와 목에 이어졌다. 그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끄응-”

 

  그녀는 테이프를 편하게 돌려감기 위해 그의 무거운 양 다리를 소파에 올려놓으며 신음했다. 묶는 내내 깨어나면 한 번 더 내려치려고 장도리를 소파 아래 놓아두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가 죽어 버리면 어쩌나 조금 걱정되어서 깨어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기도는 통했고 그의 몸통 전체와 허벅지, 종아리를 넓게 청테이프로 돌돌 마는 동안 그는 미동도 안했다. 다 소진한 청테이프의 얄팍하고 동그란 심지가 10개째 그녀의 허벅지 옆에 순서대로 놓여졌다.

  턱과 머리의 상처에 났던 피가 슬금슬금 말라 뭍을 즈음 그가 송충이처럼 몸을 움찔거렸다. 그는 소파에 청색의 번데기처럼 얌전히 눕혀있었다. 몸집이 자그마한 그녀가 축 늘어진 그의 몸을 소파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한참 씨름해야 했지만, 그 소파는 그가 좋아하는 곳이니까, 반년이 넘게 푹신하고 아늑한 침대도 거절하고, 그녀 옆도 거절하고 늘 쭈그려 잠을 청하는 소중한 곳이니까 그는 이곳에 눕혀 두는 것이 좋다.

  그녀는 식탁의자를 끌어다 그의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무릎에는 냉장고 앞에서 그를 공격할 때 썼던 장도리가 얌전히 높여 있고 그녀는 예의 그 관계의 회복에 대한 책을 읽고 있다. 쇠머리 부분을 하늘색 도트무늬 천으로 돌돌 말아 싼 장도리는 마치 등을 안마할 때 쓸법한 용도로 보였지만, 그것은 단연코 묵직한 장도리다.
  그의 신음소리가 나자 그녀는 책을 보고 있던 눈을 잠깐 떼서 그를 바라보았다. 부어오른 왼쪽 눈을 찡긋 거리며 그가 초점을 맞추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파악하려고 애쓰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다시 눈을 내려 책을 바라보고 한 장을 넘겼다. 욱신거리는 통증사이로 겨우 상황이 파악된 그가 그녀에게 갈라진 목소리를 쥐어짜서 위엄 있게 말했다.

 

  “...이 ..이게 뭐하는 거야..너 뭐야!”
  “......이제 우리가 대화를 좀 하네요. 그죠?”

 

  그녀는 책을 두 어장 더 넘기다가 덮어버렸다. 그리고 의자 옆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는 목을 내려 자신을 돌돌 말고 있는 청테이프 뭉치를 보며 악을 썼다.

 

  “너..너 지금 뭐하는 거야..너 미쳤어? 이거 안 풀어?”
  “오랜만에 하는 대화에요, 우리 거친 말을 쓰지 말아요.”
  “야!!!!”

 

  힘껏 소리를 지른 그가 말라붙은 혀에 침을 적시고 숨을 골랐다.

 

  “이거 풀어. 지금 그만 하면 더 이상 묻지 않을 테니까. 이거부터 풀어!!”
  “소리 지르지 말아요. 옆집에서 싸우는지 알아요.”
  “야. 이 미친년아!!!”

 

  그가 못에 핏대를 새우고 악을 썼다. 그녀는 그의 말에 어깨를 올리며 인상을 썼다. 가지런히 올려 있던 오른쪽 손이 움직여 장도리의 손잡이를 잡았다.

 

  “어쩜 그렇게 저속한 말을 쓰는 거예요? 정말, 안 되겠다.”

 

  일어선 그녀가 그의 앞으로 몇 걸음 왔다. 그가 목을 돌려 그녀의 높게 올린 팔을 겁에 질린 얼굴로 올려다봤다.

 

  “뭐..뭐하는...하.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괜찮아요.”

 

  그녀가 건조하게 웃었다. 툭, 별다른 소음 없이, 그러나 충분한 타격력으로 천에 쌓인 장도리의 넓적한 부분이 그대로 그의 윗잇몸 부근에 내리 꽂혔다.

 

  “그아아아아아--”
  “소리 내지 말라구요...”

 

  그녀가 한 번 더 가볍게 망치를 들어 올렸다. 투욱.

 

  “크으으윽- 그마아에..그마아.. 컥컥...”

 

  뼈까지 부서지지는 않았어도 이 몇 개는 거의 빠져 부들거리고 있는 것이 분명한 그의 입에 피가 울컥 차올랐다. 그가 목을 돌려 기침을 하는 통에 그녀의 하얀 면 치마에도 피가 몇 점 튀었다.

 

  “아. 치마가...에휴.. 삶아야겠다.”

 

  그녀는 망치를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치마를 살펴봤다. 그가 목을 크게 움직여 자신의 피를 삼키며 겨우 목소리를 쥐어짰다.

 

  “에..에...”
  “응? 뭐라구요?”
  “..에우,,,우에..”
  “왜? 왜 그러냐구요?”

 

  그녀는 망치를 들었던 손을 내려뜨리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얇은 손목으로 힘겹게 휘두른 탓에 욱신거리는 손목을 다른 손으로 주무르며 말했다.

 

  “대화하는 거잖아요. 당신이 내 말도 안 듣고, 나한테 말도 안하고, 대화는커녕 얼굴 마주보는 것도 싫어 하니까 이렇게라도 해야죠. 책에서 봤는데 조금 억지스런 방법으로라도 둘이 한자리에 있게 되는 게 일단계라고 했어요. 아, 억지스런 방법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방법이었나? 뭐. 아무래도 괜찮겠죠? 일단 함께 있으니까.”

 

  그가 고통이 심한지 부들부들 떨리는 눈꺼풀을 세게 감았다. 눈 끝에 매달린 통증의 눈물이 그의 관자놀이로 핏물을 타고 흘렀다. 그녀가 다시 피에 젖은 망치를 무릎에 다소곳이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내가 노력해보자고 했잖아요. 아무리 우리가 깊은 애정 없이 시작한 사이어도, 당신 말마따나 당신 어머니가 원해서 나와 결혼한 거였어도 우린 부부잖아요. 당신이 내 옆에는 앉기조차 싫어할 때도, 내가 침대에서 자면 소파에서 자고. 내가 거실로 나가서 자면 침대에서 자도. 그런 주제에 내 몸을 원할 때는 당당하게 잠자리를 요구할 때도 그렇게 실컷 뒹굴고 나서 내가 여자 같지 않다고 말 할 때도, 내가 애써 차린 음식들을 버리다시피 할 때도, 내 살림과 당신을 챙기는 행동을 비아냥거릴 때도! 나를 모멸하고, 내 가족을 모욕하고!! 버릇처럼, 취미처럼 나를 상처 주는 말을 할 때도!!! 우리는 부부였잖아!!!!!!!!!”

 

  처음에는 차분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목이 갈라지는 악을 지르며 끝이 났다. 그는 여전히 고통으로 끙끙 거리며 그녀를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건조한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슬픈 건지 화가 난건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당신이 날 싫어해도... 난...난 당신이 좋았어요. 좋아하려고 노력했어요... 내가 당신에게 크게 잘못한 것도 없고. 난 조금이라도 좋은 부인이 되고 싶었고, 그래서 내가 노력하면 당신도 조금은 날 보아줄 거라.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 생각했어요. 근데. 첫 번째를 하면 두 번째가 문제고, 두 번째를 해내면 세 번째가 문제고, 넷, 다섯, 열, 백, 모든 걸 해내면 그냥 처음부터 모든 게, 나 자체가 문제였다고 말하는 당신이... 그래도 난 좋아서 노력했어요. 그죠? 나 열심히 노력했죠?”

 

  그는 겁에 질려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다양한 감정이 뒤엉킨 그녀의 눈썹이 측은한 표정으로 기울어졌다.

 

  "...거짓말."

 

  그녀가 다시 몸을 일으키자 그는 반사적으로 착 달라붙어 끈적이는 테이프들이 팔뚝의 맨살을 파고들든 말든 열심히 그의 소중한 소파에 몸을 더 깊게 묻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다 거짓말이에요.”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몸을 돌려서 오디오 옆에 새워진 디지털 액자 앞으로 걸어갔다. 억지로 웃는 어색한 두 사람이 다양한 모습으로- 최대한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이리저리 포즈를 취하는 사진들이 깜짝이며 지나갔다.

 

  “당신도. 당신이 했던 말들도. 우리 결혼도. 이 사진도!!!”

 

  그녀가 휘두른 장도리에 하얀 디지털 액자가 파각 소리를 내고 베란다 창 쪽으로 날아갔다. 그대로 날아가 두툼한 커튼이 내려진 베란다 창에 부딪혀 떨어진 디지털 액자는 프레임이 부서지면서 두 번의 깜빡임도 없이 사진을 열심히 띄우던 화면을 단번에 꺼뜨리고 바닥에 뒹굴었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그녀의 실내화를 신은 발이 부서진 액자를 신나게 밟았다. 액자는 파각 파각 조그만 소리를 내며 더욱 납작하게 부서졌다. 양껏 발길질을 한 그녀는 숨을 고르고 흩어진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치마를 털고 다시 의자로 왔다. 그녀의 모습에서 겁에 질린 눈을 돌리지 못하는 그는 이제 입가에서 피거품을 질질 흘리며 울고 있었다. 잔뜩 피를 머금은 입으로 웅얼거리며 그가 겨우 말했다.

 

  “으..그마에..”

 

  그녀는 목 짓으로 흘러내린 옆머리를 넘기고 장도리의 머리를 싸매고 있던 천을 벗겨냈다. 귀여운 천 아래 서늘하게 금속의 단단한 표면이 반짝인다. 그녀의 작은 손이 애완견이라도 되는 양 망치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그마...”
  “나. 임신했어요.”
  “...!!”

 

  눈물과 침, 피 범벅이 된 얼굴로 훌쩍거리던 그가 딸꾹질하듯 숨을 삼키고 하나 남은 눈을 동그랗게 떠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임신 했다구요. 테스트로 확인했어요. 병원진단까진 아니어도 거의 정확하다고 보면 돼요.”
  “....여오...여..여오.”
  “...여보?...여보라니..웃기네요.”

 

  눈을 내려 깐 그녀의 얇은 속눈썹이 하얀 거실 조명으로 뽀얗게 빛났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지금까지의 모든 관계는 다 거짓말인데. 우리는 한 상에서 밥을 먹어도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이고. 함께 웃지도 함께 꿈을 꾸지도 않는데. 그런데 나는... 나는... 당신 아이를 가졌고...”

 

  그녀가 말을 멈추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장도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불안정하기는커녕 더욱 차분해 보였다.

 

  “그리고...난 당신을 죽일 건데.”
  “...!!”

 

  그가 몸을 꿈틀 움직였다. 평소라면 히스테리를 부리는 그녀의 악에 받힌 협박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나 그는 지금 온몸이 결박된 채로 자신의 피로 물들어가는 소파 위에 누워있다.

 

  “크으윽- 으아가가-”

 

  그가 목에 잔뜩 힘을 주고 짐승소리 같은 신음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난 당신하고 달리 다정한 사람이고, 또 마음도 넓으니까...”

 

  그녀는 장도리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장도리만 보고 있던 눈을 들고 그를 보았다. 표정 없는 얼굴을 한 그녀가 너무 높지도 흥분되지도 않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물어보았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으아악- 그아-”

 

  그가 그녀 앞에서 벗어나려고 헛되게 벌레처럼 몸을 틀었다. 끈적이는 피와 욱신거리는 상처들의 고통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와 그녀의 장도리에서 벗어 날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그녀가 생각났다는 듯이, 아. 하고 짧게 소리를 내고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전화를 꺼내들었다.

 

  “당신 어머니한테 전화해야죠? 당신한테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 하랬거든요.”
  “으윽- 으아--”
  “하긴 소용없을지도 몰라요. 평소에 전화해서 당신 이야기를 해도 그냥 참으라고 하더라구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얘가 원래 그러는 걸 어쩌겠냐고. 그리고 노인네가 안쓰럽게 훌쩍거리는데... 정작 울고 싶은 건 난데. 아. 얼마나 모든 게 비참하던지 말이에요.”

 

  그녀는 단축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귀에 가져갔다.

 

  “여보세요? 어머님?”
  “어마- 사려저-으으악!!!”

 

  그가 자신의 엄마를 향해 얼른 도움을 청할 소리를 냈다. 하지만 바로 그의 윗입술-아니 윗입술이 있던 자리로 차가운 장도리의 머리가 내려와서 꾹 눌렀다. 그가 상처를 짓누르는 고통에 목을 굳히며 침을 겨우 삼켰다. 그녀가 가슴에 전화를 안듯하며 스피커를 막고 소곤거렸다.

 

  “쉿쉿쉿...조용히 안하면 아래턱도 부숴버릴 거예요.”
  “끄으윽-”

 

  그녀는 다시 목을 가다듬고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어머님- 네. 저에요. 막내며느리. 네- 그럼요. 아. 네- 장아찌 정말 맛있더라구요. 네? 네... 뭐. 그이는 밥을 집에서 잘 안 먹어서...네. 네. 그래도 꼭꼭 내놔요. 보일 때 잘 먹는 거 보니까 맛있는 모양이에요. 네, 그럼요. 아뇨... 무슨 일은요. 늘 그렇고 뭐.... 네? 아. 네...”

 

  한참 웃으며 얌전히 조잘대던 그녀가 말했다.

 

  “근데요, 어머님... 갑자기 또 이런 말씀 드려서 정말 죄송한데요... 저... 더 이상 못 견딜 거 같아요... 저기요- 네? ...네... 네. 알아요. 저기요, 어머님....네. 네, 어머님 근데요. 저 그냥 헤어지고 싶어요...”

 

  그녀의 말이 잠깐 끊어지고 상대방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웅얼거리며 길게 이어졌다. 그녀의 눈길이 흐려지는 틈을 보던 그가 몸을 틀면서 단말마의 소리를 냈다.

 

  “어아마마 !! 크그윽- 으으으으그극!!”

 

  그러나, 길게 말을 이어가는 전화기 너머까지 그의 신음소리가 전달되지 않는지, 별다른 반응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장도리가 천천히 그의 잇몸을 눌러왔다. 그녀가 쉿- 하는 입모양을 하고 “그러면 정말 죽어요-”하고 소근거렸다. 가늘게 뜨는 그녀와 눈에 망설임이 없는 것을 알아채자, 그는 혀를 삼킨 듯 입을 다물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전화기를 다시 귀에 댄 그녀가 겨우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네...어머님 이해해요. 그 사람 성격 모난 거 이젠 잘 알고... 그래도 어머님.. 저.. 정말 사는 게 지옥 같아요... 잘못한 게 없어도 죄지은 사람처럼 눈치보고 사는 거... 네...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어머님, 저-”

 

  또 그녀의 목소리가 끊어지고 반대쪽의 일방적이고 긴 목소리가 계속 되었다. 그 사이 그녀는 간간히 짧게 대답했다.

 

  “네...네...아뇨. 네... 알겠어요. 어머님. 네.. 네 들어가세요.”
  “으으으-읍-”

 

  전화가 끊어질 쯤 멍하니 통화를 듣고, 보고 있던 그가 다시 몸을 움직였지만 그녀는 전화를 끊고 그가 늘어져 있는 소파 옆에 놓았다. 그는 통증에 몸을 틀면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한쪽 눈은 붓기가 조금 더 심해져 거의 감긴 참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장도리 끝으로 그의 입을 누른 채로 한숨을 쉬었다.

 

  “헤어지는 건 생각하지 말라 시네요. 어떻게든 살아보자고...”

 

  그녀가 또 길게 한숨을 쉰다. 그녀는 울적해보였다.

 

  “그렇게 이해심 많으신 분이면... 그냥 자기가 데리고 살던가..그죠? 왜 결혼은 시켜가지고. 응?”

 

  그녀는 쓸쓸하게 웃었지만 그의 눈에는 그 미소가 더욱 무섭게 보였다. 그녀가 그의 입에서 장도리를 치우고 의자에 다시 앉았다. 쓸쓸한 그녀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올라와 있었다.

 

  “어떤 게 좋겠어요? 응? 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계속 이렇게 절망 속에 사는 게 옳은 걸까? 대답하지도 않는 당신한테 인사를 하고 먹지도 않을 밥을 차리면서? 아니면 모두 끝내 버리는 게 좋을까? 응? 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그녀의 눈물이 점점 커졌다. 처음은 아니다. 간혹 그는 그의 앞에서 울기도 했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짜증이 났다. 그녀의 눈물의 양과 그의 자책감은 비례했다. 그녀가 울수록 그녀가 종종걸음을 치며 노력할수록 그는 자신이 더 작게 느껴지고 더 모자라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 때문에, 그는 노력하는 그녀가 미웠다. 자신처럼 포기 하지 않고 계속 더 해보자고 아직 끝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녀가, 그녀의 끈기와 긍정이 소름끼쳤다.

 

  -도망가는 게 옳은 거 아냐? 싫은 것이나, 귀찮은 것이나, 번잡한 것에서는 도망가는 게 옳은 거 아냐? 그는 자신의 유일한 취미인 자동차 모임에서 탁 트인 외진 길을 내달리며 생각했다. 이게 옳은 거야. 이 상쾌함, 풍경과 함께 등 뒤로 던져지는 현실. 책임. 의무들. 그는 점점 더 빨라지는 스피드 속에서 날개를 단 광인처럼 태양을 향해 솟구치며 크게 웃었다. 나를 잡는 것은 뿌리치고 내 달리자. 나의 마음에 말을 거는 귀찮은 것은 일단 뿌리치고 내달리자. 그래. 등 뒤로 풍경들이 사라진다. 해야 할 일들. 해야 할 말들. 풀어야 할 숙제. 짊어져야 할 책임. 모두 모두 사라진다-. 그리고 지금 그는 현실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그녀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훌쩍이고 있을 때, 그의 눈에 묶여 누인 소파 손잡이에 놓인 전화기가 보였다. 그는 임에 차오르는 역겨운 피와 침을 삼키고 그녀의 눈치를 봤다. 이성을 잃은 그녀는 그가 전화기를 본 모습을 알지 못하는 듯 했다. 정신차리면, 이 모든 상황에서 벗어 날수도 있다.

 

  “여.오.. 미..미아에..”

 

  전화기 힐끗거리던 시선을 거두고, 그는 죽을힘을 다해 눈물과 목소리를 쥐어짰다. 물론 그의 끈질긴 자존심에 미안함 따위는 없다. -뭐가 미안해? 죽을 건 내가 아니라 저 여자잖아? 그러게 왜 날 귀찮게 해? 그냥 헤어지면 될 걸, 어른들의 의견? 부부로서의 책임감?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냥 귀찮으면, 불편하면 그만두면 될 거 아냐? 왜 이렇게 서로 힘들게 질질 끄는 거야? 진작 서로 끝내면 될 걸, 누가 이렇게 귀찮게 일을 만들었는데, 그리고 뭐? 당신 애를 가졌어요? 그 애는 누가 책임질 건데? 진짜 무책임한 거 아냐? 근데 내가 뭐가 미안해?  -하지만 지금은 살고 봐야한다.

 

  “미아,.미아에...”
  “흑..흐윽,...흐어어엉...”

 

  돌연한 그의 사과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참지 못하고 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다. 그녀가 쏟아지는 눈물사이로 겨우겨우 말했다.

 

  “나도 미... 나도 미안해요..흐윽 흐으으윽..허엉...”
  “여오..”

 

  의자에서 일어선 그녀가 그의 몸에 쓰러지며 더 크게 울었다.

 

  “미안해요..정말 미안해요... 이런 짓 해서...미안해요.....흐윽....흐윽..미안...흐으윽...”
  “이..이어푸러..이거...푸고 애기하야...”
  “흑..흐윽 미안해요...”

 

  아마도 결혼 후 가장 긴 시간을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 내던 그녀가 겨우 숨을 고르며 몸을 세웠다. 여전히 훌쩍이는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절망과 슬픔에 물들어 있었다. 거짓이든 진실이든 눈물과 화해가 가득했던 10여분 만에 그녀는 남편을 때리고 묶은 잔학한 사이코에서 이전의 작고 여린 그녀로 돌아가 있었다.
  그녀의 연약한 눈썹은 일그러지고 자그마한 눈의 속눈썹은 눈물에 푹 젖어 있었다. 그녀는 얼굴의 눈물을 소매로 꼭꼭 찍어 내고 흐트러진 옆머리를 넘겼다. 그는 저려오는 몸을 꾸물거리며 애타게 그녀를 불렀다.

 

  “여오...나느..”

 

  그녀는 끙끙거리며 주저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코를 훌쩍이고 겨우 숨을 진정한 그녀가 몸을 바로 세우고 말했다. 눈물에 빨개진 코 때문에 그녀는 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눈 감아요...보면 더 아플지도 몰라.”
  “....!!!!”

 

  어느새 다시 집어든 장도리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꽉 쥔 그녀는 높게 어깨너머까지 팔을 들어 올렸다가 빠르게 그의 머리를 향해서 내리쳤다. 그에게는 더 이상, 여보- 라는 어설픈 거짓 호칭을 부를 틈도. 목숨을 구걸할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

 


  보글 보글 보글- 불규칙적인 소리가 가스레인지 위의 냄비에서 들리고 오븐 안에 들어 있는 대구구이에서는 잘 익은 고소한 냄새가 났다. 그녀가 통통 칼질을 해서 썬 붉은 고추와 푸른 고추가 잘 풀어진 계란이 담긴 뚝배기 그릇에 넣어졌다. 그녀가 계란찜 그릇을 중탕 그릇에 넣고 불을 조절했다. 식탁은 골고루 영양의 밸런스를 맞춘 반찬들이 적당한 양으로 곱게 차려져 있었다. 수저와 저분 두 쌍이 마주보며 가지런히 놓이고 한가운데에는 찌개를 위한 연보라색 실리콘 깔개가 놓였다. 귀여운 토끼모양의 주방장갑을 낀 그녀가 조심스럽게 찌게그릇을 식탁에 내려놓고 서둘러서 대구구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완성된 대구구이와 계란찜이 마지막으로 보기 좋게 상 위에 오르고 조금 전 딱 좋게 뜸이 든 밥이 들어 있는 밥솥에서 두 개의 밥그릇을 채울 밥을 펐다.
  드디어 상이 완성되고 그녀는 아까부터 식탁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그의 맞은편에 앉아 그를 보며 방긋 웃었다.

 

  “밥 들어요. 오늘은 계란찜이 좀 묽은 것 같다.”

 

  달그락, 따각, 챙. 수저와 저분이 이리 저리 움직이고 그릇과 수저가, 저분과 접시가 부딪히는 소리가 식탁에 울린다.

 

  “아. 내 정신 좀 봐.”

 

  그녀가 생각난 것이 있는지 잘 발라낸 대구 살을 입에 넣으려다가 도로 밥 위에 얹고 저분을 내려놓았다.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네. 나 잠깐 나갔다 와야겠어요. 다 먹고 나면 그릇 담가 놓고 반찬은 그냥 놔둬요. 내가 와서 치울게요.”

 

  그녀가 서둘러 일어나며 앞치마를 벗어 벽에 걸고 잰걸음으로 서재로 들어가 의자에 걸어 두었던 웃옷을 입으며 그녀의 큼직한 토드 백을 들고 나왔다. 여전히 식탁에 있는 그에게 그녀는 구두를 신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또 먹다 말지 말고 다 먹어요. 내가 모처럼만에 솜씨 낸 거니까.”

 

  그녀는 신을 다 신고 신발장 옆에 걸린 긴 거울에 옷매무새를 만졌다. 단정한 머리스타일. 심플한 회색의 코트, 코트 중앙에 나란히 박힌 5개의 큼직하고 동그란 단추는 그녀를 나이보다 조금 어려 보이게 만들었다. 만족스럽게 크게 한숨을 쉬는데 팔을 늘어뜨리다가 어깨에 걸린 토드백이 후둑 현관에 떨어졌다.

 

  “어머.”

 

  그녀는 떨어지면서 둔탁한 소리가 난 가방을 열고 가방 안에 장도리가 잘 들어 있는지 확인했다. 베갯잇을 만들고 남은 분홍색 천으로 새로이 쇠머리부분을 곱게 싼 장도리. 전화기. 그 장소까지 갈 버스를 타기 위한 지갑.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 지퍼를 올린 뒤에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녀가 몸을 돌려서 식탁 쪽을 향해 목을 쭉 빼고 말했다.

 

  “있죠. 당신이랑 이렇게 같이 밥 먹고 그러니까 좋다. 진작 그랬음 좋았을걸. 그죠.”

 

  그녀는 흘러내리는 가방끈을 다시 다부지게 어깨에 돌려 멨다. 경쾌한 목소리로 그녀가 인사했다.

 

  “다녀올게요.”

 

  그녀가 밖으로 나가고 나서 현관문이 그녀의 등 뒤로 잠겼다. 삣. 삣. 삐이-

  식탁의 근사한 음식들에서는 다정하고 풍만한 향기가 올라왔다. 그렇게 아내가 떠난 식탁에 홀로 남겨진 그는 미동도 없다. 식탁에 얌전히 앉은 그는 여전히 청테이프에 돌돌 말려져 있다. 숨이 끊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의자에 앉혀진 그의 사후강직이 슬슬 시작되고 있었고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뻣뻣하다.- 그의 얼굴에는 그녀가 손수 바느질을 해서 만들었던 연두색의 베갯잇이 단단히 씌워져 있으며 그녀의 알록달록한 목도리로 목이 돌돌 말려 목 뒤에 리본 매듭으로 꽉 메어져 있다.
  그의 얼굴을 감추어둔 연두색 베갯잇에는 드믄 드믄 배어 나온 피로 기묘한 표정이 만들어져 있다. 두툼한 눈썹과 조금 비뚤어진 코. 비스듬하게 동그란 입.- 아이가 스케치북에 그린 것 같은 피로 물든 그의 새로운 이목구비는 다정하게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어느 부부의 늦은 저녁식사,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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