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다릅니까? 1-3. 손등을 바라보다

하달리 | 2018.03.21 00:45


무엇이 다릅니까?


Section: 1. 손등을 바라보다 - 03



  잠이 급하게 몰려 나가는 것을 느끼며 이안스는 반짝 눈을 떴다. 이미 시간이 꽤 지나서 커튼이 걷혀진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잠든 건 안쪽 방의 진찰의자였는데 어느 새인가 자신의 방 침대에 눕혀져 있다. 그녀는 눈을 들어 벽에 걸린 동그란 아날로그시계를 보았다. PM 11시 48분. 벌써 자정이다. 깊게 숨을 들이마셔서 빡빡했던 폐에 산소를 가득 넣고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기상 때마다 느껴지는 둔한 감각은 주기적인 치료에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신음을 겨우 참고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나가서 불 꺼진 거실까지 가보니, 문이 활짝 열려있는 작업실의 빛 그림자가 길게 거실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 시스, 돌아와 있네. 이안스는 둔한 몸을 천천히 움직여 작업실 쪽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 모니터에 잔뜩 집중하고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을 시스를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이안스는 그를 부르려 오므리고 있던 입술에 힘을 주었다.


  “시...”

  “이건 오늘 내가 백업받은 최근 일주일 정도의 데이터야.”


  이안스가 그의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거실에선 잘 보이지 않는 작업실 안쪽에서 여자의 짐짓 심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샤의 목소리였다. 이렇게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그녀는 아직 돌아가지 않은 듯 했다. 그녀의 말에 시스가 느릿하게 반응하며 짧게 대답했다.


  “......네.”

  “이 정도 이상 징후를 보이면 바로 연락해야지, 왜 안했어? 나 검토하면서 깜짝 놀랐어.”

  “......”


  그녀의 다그침에도 시스는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채로 모니터만 노려보고 있었다. 이안스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힘겹게 움직여서 작업실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까만 해도 컨디션이 좋았는데, 지금은 유난하게 몸의 움직임이 둔하고 머리에서는 미열이 났다. 키샤의 채근에도 내내 말이 없던 시스가 표정의 변화 없이 짧게 그녀에게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아니, 미안해하라는 게 아니고.-”


  그녀가 손에 든 타블렛 컴퓨터를 바쁘게 조작하는 동시에 시스의 곁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이건 감출게 아냐, 실수도 아니고. 이건 대단한 거야. 임의의 변수에 의해서도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게 쉬운 게 아니잖아. 이건 완전히 새로운 거란 말야!”


  그녀는 흥분해서 양손을 위로 올려는 큰 몸짓을 보이며 방안을 왔다 갔다 했다. 시스는 그런 그녀를 눈으로 쫓다가 손가락 몇 개로 키보드를 건성건성 두드렸다. 방안의 공기를 휘저어 놓으며 오락가락하던 그녀가 빠르게 다시 책상으로 다가가 양손을 책상에 짚고 그에게 물었다.


  “아직 규칙적인 패턴을 보이지 않는 거야? 그래서 보고 안했어? 응? 그래?”


  서너 번을 이어 묻는 그녀의 재촉에 뜸을 들이던 시스가 손을 들어 흘러내린 머리를 넘기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3주 이상 일관된 반응을 지속적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그럼 뭐야!  그 정도로 정형화된 상태라면 빨리 얘기 했어야지!”

  "아뇨, 그냥 난..."


  초조함을 표현하듯 입술에 힘을 주고 움직이던 그는 작은 목소리로 변명하듯 말했다.


  “템페의 상태가... 걱정돼서...”


  그의 말에 내내 흥분해 들떠 있던 그녀가 몸을 세우고 그를 돌아보았다. 시스는 자판을 만지고 있는 자신의 손에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무표정은 여전했지만 내려뜬 그의 속눈썹에 작업실 스탠드의 빛이 하얗게 비쳐서 침울해 보였다.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기보다 다정하네?”

  “그런 거 아닙니다.”

  “정말?”


  놀리는 억양이 들어간 반문에 그가 따지듯이 그녀를 노려보며 눈을 올려 떴다. 키샤는 그의 눈길의 변화가 재미있는지, 허리를 쭉 뻗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웃음을 잦아 들인 키샤는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양손을 책상위로 뻗어 그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책상너머로 굽혀서 그의 오른쪽 뺨에 길게 입을 맞췄다.

  하얀 얼굴이 그녀의 그림자로 어두워졌던 그는 그녀가 몸을 일으키고 얼굴에서 손을 뗄 때까지 아무 변화도 반응도 없었다. 방 건너편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간 그녀는 다시 타블렛 컴퓨터를 집어 들고 파일을 열었다. 그는 목을 들고 눈썹을 조금 움직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왜요?”

  “응? 뭐가?”

  “왜 키스 했어요?”

  “그냥. 착해서.”

  “뭐에요, 그게. 내가 무슨 어린애- 어?!”


  그녀의 장난기 섞인 대답에 시스는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키다가 방문 앞에 힘겹게 서있는 이안스의 하얀 얼굴을 발견하자, 그의 웃음은 빠르게 사라지며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이 그의 잘생긴 얼굴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안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거의 표정이 없는 그 인데. 키샤와 함께 있을 때는 저런 선명한 표정을 만들어낸다. 그녀는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 문틀을 짚은 손을 놓치며 휘청거렸다.


  “템페?!”


  시스가 방문으로 급히 다가가서 쓰러질듯 문틀에 기대선 이안스의 허리를 잡아 부축하며 일으켰다.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일어났어?”

  “...그, 그냥 깼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려고 애썼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다정하게 키스를 하던 둘의 모습이 몇 번이고 다시 재생되었다.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있는 시스의 팔과 손이 안정감을 주기는커녕 평소보다 더 차갑게 느껴지는 탓에 몸의 모든 피가 식는 것 같아서 몸이 떨렸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스의 얼굴에 겨우 웃어 보이고 키샤 쪽을 바라보니 키샤도 놀란 얼굴로 둘 쪽으로 서둘러 오는 것이 보였다.


  “이안스! 어떻게 일어났어?”

  “인기척에... 깼어요.”

  “......”


  이안스는 눈동자만 움직여 시스와 키샤가 곤란한 얼굴로 서로 마주 보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뱃속에서 무언가 울렁거리고 목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시선을 한참 교환하던 키샤가 이안스 쪽으로 다가왔다.


  “이안스. 잠깐 이쪽으로 누워 볼..”

  “아니에요, 전 괜찮으니까 가셔도 되요.”


  이안스는 그녀의 말을 자르며 손을 힘없이 휘저었다. 키샤와 그녀를 번갈아 보던 시스가 그런 이안스를 달래듯이 말했다.


  “템페. 너 괜찮은지 봐주시려는 거니까 괜찮아. 얼른 누워.”


  그러나 시스가 키샤의 역정을 드는 것 같아서 그녀의 기분은 오히려 더욱 불쾌해졌다.


  “난 괜찮아. 그냥 가시라고 해, 돌아가셔도 돼요. 다음에 뵐게요.”

  “이안...”

  “난 괜찮다구요!!”


  그녀가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버럭 소리를 치고 시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나 방에 대려다줘.”

  “...템페.”

  “얼른! 나 힘들어!”


  어리광과 애원이 섞인 짜증이 멋대로 입에서 흘러 나왔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키샤의 시선을 외면했지만 그녀의 예의 없는 행동에 키샤는 분명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그녀의 서운한 눈길이 등에 닿는 기분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왜 키스했어요?] [그냥. 착해서.] 이안스는 진찰 중에 키샤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사실 짝사랑은 하고 있지만, 그 사람은 나한테 전혀 관심이 없거든.]

  싫어! 그 짝사랑의 상대가 시스라면 아무리 키샤라도 아니, 키샤니까 더욱 싫어! 그의 어깨에 고개를 흔들어 비비는 이안스를 내려다보며 시스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품에 안아 들고 키샤를 향해 말했다.


  “키샤. 오늘은 그만 가는 게 좋겠어요. 연락드릴게요.”

  “응. 그래. 그럼 다음에...”

  “빨리! 나 피곤하다고!”


  키샤가 돌아가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빨리 내 방으로 날 데려가 달라고! 이안스는 아이처럼 퉁퉁거리는 목소리로 그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시스는 몇 걸음 움직이며 목을 틀었다.


  “템페. 아파. 팔 좀...”


  그러나 이안스는 현관이 닫히고 잠기는 소리가 날 때까지 그를 끌어안은 팔의 힘을 풀지 않았다. 문의 잠금 장치에서 신호음이 울리고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이안스는 팔의 힘을 풀고 시스의 품에 기댔다. 아직 감각이 다 돌아오지 않은 두 다리가 시스에게 안긴 탓에 공중에서 나뭇가지처럼 흔들 거렸다. 고개를 깊게 숙여 얼굴을 시스의 품속에 숨긴 채 꼼짝 않고 있는 이안스를 향해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템페, 어디 이상한 곳 있어? 얼굴이 뜨거운 것 같은데, 과하게 열이 난다던가, 말초신경의 무감각 같은 증상 없어?”

  “...그런 거 없어. 그냥 기분이 안 좋고 몸이 피곤해. 그거뿐이야. 그냥 방에 갈래.”

   “알았어.”


  시스는 이안스의 방으로 들어와서 그녀를 침대에 눕혀주었다. 구겨진 시트주름을 펴고 몸을 일으키려는 시스의 손을 이안스가 급하게 잡았다.


  “어디 가지마.”

  “안 나가.”

  “여기 있어. 나 잠들 때까지.”

  “......”

  “응?”


  애원하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보고 있는 시스의 검은 눈동자는 다소 혼란스러운 느낌을 띄우고 있지만, 얼굴 근육은 또다시 밋밋해 진채로 작은 움직임도 없다. 이안스가 잡고 있는 손을 놓을 생각을 않자, 시스는 고개를 들고 방 한구석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지금 일어난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처 답안을 연산해 내고 있는 중인지, 그는 어두운 공간을 한참동안 움직임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잠들기까지 옆에 있어주는 문제에 대한 답을 도출 하는 것이 시스에게 그렇게나 어려운 일일까?


  “알았어. 어서 자.”


  드디어 입을 연 그가 침대모서리에 앉았다. 이안스는 침대를 짚고 있는 그의 차가운 손을 끌어다 가슴에 안고 모로 누웠다. 손의 온기로 열심히 시스의 온도를 높여본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웅크려진 주먹은 서늘했다.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이안스가 말했다.


  “키스해 줘.”


  여전히 어둠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이안스의 목소리에 목을 돌려 누워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안스는 재촉하며 품에 안은 손을 끌어당겼다.


  “빨리, 키스해 줘.”

  “......”


  대답도 움직임도 없는 그의 주먹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어 두어 번 더 끌어당기자, 잠시 후 시스는 천천히 몸을 숙여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제야 바짝 서있던 신경 끈이 이완되고 얕고 밭은 호흡이 크고 길게 한숨이 되어 나왔다. 시스의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이안스의 볼을 간질이고 허리에 둘러진 그의 차가운 손이 등허리의 맨살에 닿는다고 느낀 순간, 그녀는 불이 꺼지듯 순식간에 나락 같은 깊은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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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ction/무엇이다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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